2025. 7. 16.
기묘상점

The Backrooms

오늘의 이야기 <끝나지 않는 노란 복도, 백룸>

너무 평범해서 오싹한 공간, 백룸이 탄생한 날

기묘함에는 사건보다 공간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한 경우가 있다. 오늘의 이야깃거리인 ‘백룸(Backrooms)’이 바로 그런 곳이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지만, 실제보다 더 실재같은 세계. 백룸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평범한 공간에서 출발한다. 텅 빈 복도에 깔린 누렇게 바랜 카펫과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전기 소음. 처음 보는 장소인데 어딘가 친숙한 건 왜일까. 아무도 없지만 갑자기 누가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적어도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가장 섬뜩하다.

이름 그대로 백룸은 ‘상점 뒤편에 있는 창고 같은 공간’을 뜻하지만, 밈의 세계에서는 훨씬 더 복잡하고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는 2019년, 한 익명의 유저가 4chan에 올린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되었다. ‘현실에서 잘못 떨어지면 들어가게 되는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누군가 그 설명에 이야기를 보탰고, 여러 사람들이 레벨 구조와 괴생명체 설정을 추가하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완성되었다.

공간과 세계관, 끝없는 확장

백룸을 다룬 콘텐츠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디지털 호러 장르의 영상 콘텐츠, 또 하나는 위키를 기반으로 한 세계관 구축이다. 특히 유튜브 채널[Kane Pixels]의 영상은 백룸이라는 콘셉트를 본격적인 영상 서사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영상 <The Backrooms(Found Footage)>에서는 1990년대 캠코더 화질을 흉내 내며, 한 소년이 우연히 백룸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을 담는다. 거기엔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벽, 그 안을 어슬렁거리는 엔티티, 어쩐지 수학적으로 설계된 듯한 미로 구조, 들릴 듯 말 듯한 기계음에서 오는 공포가 있다.


촘촘하게 설계된 세계관이 궁금하다면 위키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끝없는 복도는 고작 레벨 0으로, 레벨이 거듭될수록 점차 환경이 열악해진다. 때로는 비교적 안전한 공간이 등장해 잠시 숨을 돌리게 해주기도 한다. 어떤 레벨은 동화 속 마을같은 방(레벨94 Motion)에서, 어떤 레벨은 물로 가득 찬 음산한 방(레벨37 Sublimity)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특이한 건, 이 모든 설정이 특정한 스토리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룸은 단선적인 플롯보다도 ‘분위기’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작동한다. 공간이 사건보다 강한 장르, 백룸은 그걸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친숙한데 낯선

백룸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단순히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 안에는 기억의 조각이 숨어 있다. 유치원 화장실에서 맡았던 특유의 세제 냄새라든가 어릴 때 갔던 병원 대기실의 쨍한 형광등 불빛 같은 감각적 기억들이 백룸의 설정과 겹칠 때, 사람들은 묘한 불안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느낀다.

그리고 그 친숙하면서 낯선 감정은 백룸이라는 설정을 단순한 밈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민속 설화’처럼 만들었다. 상업적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백룸에 새로운 방을 만들고,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고, 그안에서의 생존과 탈출을 상상한다.

게임으로 만나는 백룸

Escape the Backrooms’, Inside the Backrooms’처럼 여러 명이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 인디 게임이 꾸준히 출시되고 있다. 스팀에서 구매할 수 있고, 리뷰도 제법 좋아 보인다. 게임으로 백룸의 미로를 체험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묘함을 소비하는 방법

백룸이라는 콘텐츠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기묘한 감정은 혼자서 느낄 때 가장 강렬하지만, 누군가와 나누면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커뮤니티에 글을 남기고, 댓글을 주고받고, 2차 창작으로 자신만의 ‘방’을 만들며 이 세계를 계속 넓혀간다.

사건보다 공간이 먼저고, 구조가 인물보다 우선인 세계. 그 안에서는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을 수 있다. 정해진 플롯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각자의 기억과 감각이 더해진 새로운 백룸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생겨나고 있다.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때를 기다리며 어딘가에 잠시 머물 뿐이다. 그 공간이 실제든 상상이든 언젠가는 누군가 그 문을 다시 열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기묘함’도 그때 다시 돌아온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로, 조용히. 그 낯섦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순간 친숙한 세계의 틈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꼭 백룸이 아니어도 말이다.